전라도 여행에서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10년 정도 머무렀다는 다산초당. 산 아래에서 초당까지 오르는 길은 그의 발걸음을 뒤따르는 것 같다. 그리고 만덕산 산비탈을 따라 백련사로 가는 길도 그렇다. 백련사 주지와 왕래가 잦았다니 이야기가 길어진 날 새벽이슬, 달빛에 그 길을 걸었을 그를 생각한다.
그렇게 다산초당은 길로 와 닿았다. 마을에서 올라가다 만난 두충나무 숲길은 처음이다. 자작나무 처럼 곧게 뻗은 나무 사이로 자갈길을 밟은 느낌이 좋다. 이 길은 다산이 살던 때 것이 아니다.
다산초당 가는 길.
비탈길로 접어들어 만난 나무뿌리들은 마음을 아프게 한다. 꼭 다산이 유배생활하면서 수없이 오르내렸을 그길이 헤집어져 뼈까지 드러난 그의 고통같이 와닿았다. 그길을 따라 다다른 다산초당. 근대에 가꾸었다지만 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기와집에서 유배생활을 했을라고. 다시 초가로 바꾼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짚이나 풀로 이은 집이어야 초당이지.
초당 안에 놓인 다산의 초상, 안경을 썼다. 신문물을 몸에 걸쳤으니 실학자 같다. 같이 여행한 이는 "공부 잘 하게 생겼네"라고 한다. 초당 앞에 그가 차를 마셨다는 너르고 평평한 바위. 뒤쪽 암벽에 그가 새긴 '정석', 정약용의 돌이라고 유배지를 떠나며 새겼단다.
다산초당을 찾았다면 백련사 넘어가는 길까지 가야 한다. 그가 생각에 젖어 강진만을 바라봤을 해월루에도 올라봐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그가 그곳에서 흑산도에 있던 형 약전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하더만. 꼭 형제가 그리워 먼 곳을 바라만 봤겠는가. 강진만, 매립으로 농토로 변한 곳이 예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뻘이었을 것이다. 초당에서 내려가면 바로 갯가였겠다.
해월루에 바라본 강진만.
유배였지만 그래도 그는 제자를 옆에 둘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그러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키우고 발휘했으니.
* 강진의 인물 김영랑
강진읍에 김영랑 생가가 있다. 큰 길에서 생가까지 올라가는 양쪽으로 돌담이 보기좋다. <모란이 피기까지> 시로 유명한 그의 생가에는 모란이 많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는 서정주 시와는 분명히 다르다.
집 앞에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라고 시작하는 시비가 있다. 집안에는 꽃은 없지만 모란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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